《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깽판치기 <극동전쟁>편 01
1905년 10월 1일부터 시작하여 이듬해  11월 11일에 끝난 전쟁. 참전국은 대한제국, 러시아제국, 대일본제국, 대청국이 참전했으며 영국이 일본으로의 군수지원을 맡았으나 일본국기를 단 군함과 상선을 인원채로 파견하였다가 막대한 손실을 보는 등, 실질적인 참전국에 포함된다.

배경
한반도를 일본의 영토화 하려는 일본의 야심과 극동에서 러시아의 세력확대를 막기 위한 영국의 야망, 그리고 극동에서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러시아의 의지,  생존에 목을 맨 대한제국과 상실한 영토 회복을 노린 대청국이 가담하면서 전쟁이 확산되었다.

과정
1. 1894년 청일전쟁중 조선의 병참기지화를 노리고 조선궁정을 장악하려는 일본군 후비2여단의 공세가 탄약의 자연발화로 인한 폭발로 여단 및 연대본부 그리고 포병대대 전체와 보병대대 2개분의 병력이 소멸하고 김시혁의 경복궁 방어 성공으로 잔여 보병들의 손실이 조선병 1인을 죽이기 위해 일본병 100명이 전사한다는 대 피해를 받자 주조선 각국 공사들이 중재로 조선의 책임을 묻지 않는 대신 조선의 전쟁지원을 받아내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일본은 전장을 조선이 아닌 만주로 옮겨 싸워야 했으며, 전쟁 초기에 압록강 해전에서의 승리로 서해 제해권을 장악했기에 그나마 만주를 향한 군수지원은 미약하나마 지속될 수 있었다. 만약 북양군이 적절한 군수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면 요동반도 전역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2. 1895년의 시모노세키 조약은 조선에 대한 청국 종주권 소멸, 요동반도와 대만성의 일본할양, 4억 엔의 배상금이 규정되었다. 이 때,  최후의 조공 의무라는 명분으로 김상헌이 고평은 16억 냥 상당의 순금을 청 궁정의 지배자인 서태후에게 헌납하자, 서태후가 최후 조공에 대한 사여로서 만주 동부를 헌납자 김상헌 아호를 써서 덕부신 대공작이름을 붙여 조선국 신라성으로서 조선에게 양여한다.

또한, 요동반도가 러시아 독일 프랑스 삼개국의 간섭으로 반환되었고, 추가적으로 배상금 1억 엔을 받은 일본은 친러행보를 보이려는 고종을 협박하기 위해 신임 주조선공사 미우라 고로는 독자적으로 민비 살해를 계획하여 주조선 공사관 수비연대 전체병력과 로닌 구백인을 동원한 제이차 경복궁 야간 습격을 계획하나, 하필 거사 삼일전 아침에 토쿄 주재 각국 공사관과 주일 외국인 모두에게 계획이 고종과 민비 및 왕자들과 공주들을 잡아다 강간을 한다는 터무니 없는 형태로 누설되었음을 본국으로부터 사정청취 통보를 받자 급거 당일 오후 계획을 강행하였으나, 병력이 모두 집결한 장소에 커다란 벼락이 치면서 공사와 공사관원  전원을 포함한 일본인 전원이 벼락을 맞고 불타 죽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계획은 파탄이 난다.

게다가, 항의를 하려던 일본에게 불행히도 메이지 대진재라는 일본 전국에 추정 리히터 진도 10 이상이라는 초대형 지진이 습격하고 여진조차 매일 세네 차례씩 진도 8~9사이를 오가며 한달 동안 지속되어 결국 사태는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배상금의 상당수는 군비에 투입되었고, 십년이 걸린 재건 비용의 상당수는 조선에서 십년동안 선불로 지급한 유학생 교육지원금으로 보충해야 했다. 여담으로 유학생들 교육기간은 매우 빡빡하여 이년에 학부, 일년에 석사, 일년에 박사라는 초단기 교육이었다. 나머지 육년분은 삥땅한 셈...

반대급부로 이 기간에 조선은 일본 이상의 급격한 근대화를 강행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으니, 근대식 조세와 행정 및 사법기관의 설치 등등 있었고 성균관이 서양식 인문사회과학 대학으로 개편되고 군기시 이공학원이 신설되었으며 연간 구백톤 규모로 채굴되는 내장원 관할 광산의 순금으로  금본위제가 정착되면서 동시에 금융과 경ㆍ중공업 및 유통을 위한 교통망의 정비 등등이  조선과 대한제국 최대의 재정수입처가 되는 내장원 수입을 기반으로 초고속 성장이 되면서 원 역사 1907년 기준으로 일본 국력과 동등한 수준까지 그리고 산업기술능력은 1920년대 미영프독까지 대한제국의 GDP와 지식능력이 급격히 팽창ㆍ성장한다. 그 결과, 대한제국은 5개사단과 16개 중(重)여단으로 완전편성된 육군과 장갑순양함 5척과 방호순양함 8척 그리고 대형 수뢰함 32척으로 구성된 해군을 다수의 국산품으로 가지게 되었고, 개전 직전 상비배수량 이만 이천 톤이라는  단일거포 다수탑재 전함인 무외無畏와 무적을 완성시켰다.

3. 1900~1903년간 진행된 보어전쟁에서 세계질서 중에서 영국의 절대적 우위를 상징하는 "위대한 고립"이 실제로는 진실된 외교적 고립이었음을 인지하고 막대한 전쟁재정지출에 경제가 휘청거린 영국은 극동에서의 러시아 저지를 위해 대리인을 찾았다. 친러 경향의 전제군주국 대한제국과 반식민지 대청국을 제외한 영국은 일본과의 동맹을 1904년 11월 27일 성립시키니 이것이 영일동맹이다.

문제는 이 동맹이 일본에 의한 한반도 독점 지배 및 만주 영향권 설정을 영국이 승인한 것이라고 일본측이 전국민적으로 오해하면서 이를 방해한다고 여긴 대러시아 전쟁에 나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1895년 수준 경제로 대진재의 경제피해를 복구한 일본 사정을 파악하는 현실적 온건파들은 있었고, 이들 및 한국내 친일적 현실론자에 의해 전쟁위기 회피를 목적으로 고종 및 대일경계론자들을 설득하여 영일동맹에 부속하는 한일동맹의 성립을 기도하였다(1905년 9월 3일 사이온지-이완용 의견교환 각서).

그러나, 이 각서가 의견교환 형태로 진행되는 도중에 한국이 일본의 "무조건적인 지도적 지배"를 스스로 청하였다는 오보 형식으로 대대적으로 누설되면서(9월15일아사히ㆍ마이니치ㆍ토쿄니치니치  등등 주요 신문 일제보도)  한국내 여론은 물론 한국내 친일파들마저 모두 대일강경론 아니면 방관으로 전환하고 말았다(9월 22일 각서 파기 통보).

결국, 일본은 전쟁으로 러시아 및 한국을 굴복시켜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기로 결정하였다. 문제는 전쟁을 위한 준비기간이 아예 없다시피 하여 육군참모차장 나가오카 가이시가 개전일을 통보 받은 날짜는 고작 개전일로부터 6일 전, 작전은 고사하고 전략조차 준비부족으로 고심한 나가오카가 작전계획 수립을 위한 시간벌이를 위해 개전 연기 또는 취소를 노리고 지방의 여단장으로 근무중인 작전통 토조 히데노리와 전술통 이구치 쇼고의 조력을 구하여 급거 상경시켜 삼인 합동으로 현실적 미비를 들어 개전 반대를 추진했으나 되려 삼인  모두 후비사단의 장으로 보직을 전환당하였고 일본은 말 그대로 작전 초안만도 못한 메모지 낙서 상태로 전쟁을 시작하는 황당한 사태가 되었다. 결국 일본의 처참한 패전은 예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Posted by wind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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